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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초상


예전부터 읽고 싶었던 오사 게렌발의 <7층>과 <가족의 초상>을 연달아 읽었다. 사실 그렇데 많은 분량이 아니라(<에식스 카운티>와 비교해 보라), 금세 다 읽을 수가 있었다. <7층>도 마찬가지였지만, <가족의 초상> 역시 가벼운 이야기가 아니라 쉽지는 않았던 것 같다. 빨리 다 읽어야 한다는 강박에 쫓기듯 그렇게 휘리릭 읽고 나서도 여전히 머릿속에 잔영이 남아 있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가족의 초상>은 마리 요한슨 가족 구성원 4명과 외부인, 이른바 ‘가족의 친구’ 라그나르 아저씨가 말하는 다섯 가지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사람들은 누구나 다 자신의 이야기로 세상을 살아 나간다. 그런 점에서, 한 가지 사건을 경험했지만 해석하는 이들의 관점에 따라 달라지는 이야기라는 점은 영화 <라쇼몽>을 떠올리게 한다. 첫 번째 주자로 등장하는 라그나르 아저씨는 요한슨 가족의 친구이다. 그런데 이 아저씨, 그 집 큰 딸인 18살난 마리를 좋아한다. 반했다, 홀렸다라는 말을 두서없이 반복하지만, 그녀를 사랑하는 모양이다. 대책 없는 돼지라고 마리는 거침없이 폭언을 일삼는다. 그리고 마리 엄마와 아빠의 사이가 벌어진 틈을 파고 들어, 마리의 엄마와 재혼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여전히 마리의 환심을 사기 위해 노력 중이라나. 스웨덴판 막장 드라마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다. 다음은 마리 엄마의 변론이다. 마리 엄마는 자신의 재혼에 가장 결사적으로 반대한 마리와 화해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마리의 결사적인 반대와 노골적인 거부로 대화가 단절된 채 10년을 지내왔다. 그렇다고 해서 새로 결혼한 라그나르 씨를 사랑하는 것도 아닌 것 같다고 말한다. 자신이 가장 위로가 필요했을 때, 다른 꿍꿍이를 가지고 접근한 사람과 사는 것이 어떤 느낌일지 독자는 알지만 그녀 자신은 모르고 있다. 엄마로서의 삶보다,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다른 선택을 한 마리의 엄마. 그녀를 무조건적으로 비난할 수 있을까. 거시적인 점에서 본다면 그녀야말로 가장 힘든 결정을 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주인공 마리가 등장할 차례다. 어려서부터 독립적인 성향으로 무엇이든 혼자 해온 그녀 역시 타인의 도움이 필요할 때가 있는 법이다. 사회적 인간이 혼자의 힘으로 살 수 없다는 건 인류 역사가 증명해 오지 않았던가. 오, 물론 로빈슨 크루소 아저씨처럼 고립된 무인도에서 맨 정신으로 잘 살아왔다는 전설이 있기는 하지만 모두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만화의 맨 끝에 등장하는 여동생 스티나와는 달리 모든 면네서 비관적인 마리는 라그나르 씨와의 사건 후의 트라우마 때문인지 엄마의 재혼을 결사적으로 반대하면서, 라그나르냐 아니면 자신이냐고 엄마에게 선택을 강요하기도 한다. 그녀의 삶은 불평불만으로 가득하다. 게다가 비뇨기 감염으로 신체적 고통까지 감당해내야 하는 그녀의 정신발작은 시시때때로 도진다. 산부인과 앞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큰딸 마리를 픽업하러 간 아빠의 이야기도 이어진다. 그저 평화주의자인 아빠는 문제를 대면하고 해결하는 대신 회피하는 전략으로 가정의 붕괴에 일조한다. 마리는 새로 가족을 꾸린 아빠를 신랄하게 비판하지만, 이 나이에 무슨 사랑이냐며 능구렁이처럼 또 문제를 회피하려는 아빠 앞에서 다시 발작증세를 보인다. 답이 없구나 도대체 이 요한슨 가족. 어쩌면 먹고 살 걱정이 없어진 선진국병이라고 해야 할까. 당장의 생존이 눈앞에 있는 이들에게 요한슨 가족이 겪는 고통은 이해할 수 없는 문제이지 않을까.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라는 톨스토이의 그 유명한 문구가 연상된다. 화장실로 도망간 마리를 7분 정도 기다리다 떠나 버리는 아빠의 문제피하기 전법은 정말 답이 없어 보였다. 불평불만으로 가득한 언니 마리에 비해, 어려서부터 작은 천사였다는 스티나의 현재는 마리의 그것과 너무 대조적이다. 일체유심론을 설파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을 어떻게 받아 들이냐에 따라 천국과 지옥이 현실세계에 개입하게 되는 게 아닐까. 누구나 다 스티나 같은 삶을 살고 싶을 것이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응 개인적 성향 때문에 마리 같은 경우에 처해 있다면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이제 막 결혼을 앞두고, 막장 드라마에서나 등장할 법한 자신의 가족을 되돌아보며 한숨짓는 스티나의 모습에서 문득 나의 행복지수를 점검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정도는 ‘행복하자’는 즐거워 보이는 구호로 현실을 무감각하게 만들고 있는 건 아닐까. 하긴 행복을 거부 하고 싶은 사람이 어딨겠냐만서도. 말미에 오사 게렌발은 <가족의 초상>이 자신의 최악의 작품이라며 이 책을 읽지 말란다. 십년 전에 자신이 쓰고 그린 그림에 대한 부정인가. 만화에서 마리가 당한 부당함에 대해서도 다른 작품을 통해 그녀에게 보상했다고 한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예전 행동에 대해 이해가 가지 않을 때도 있는 법이다. 그 땐 그랬지 하고, 미소 짓게 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한 모양이다.
스웨덴 작가 오사 게렌발의 두 번째 그래픽 노블
가족 간의 의사소통 불능을 폭로한 5막 1장의 심리 드라마

이 책은 마치 한 편의 연극과 같은 구조를 띠고 있다. 각 인물들의 모놀로그가 5막 1장의 에피소드로 신랄하게 그려진다. 일련의 사건들 이후 10여 년이 흐르면서 장면 장면은 드라마 같은 전개와 더불어 다섯 배우들의 심정적 토로로 이어진다. 부모인 라이프와 건, 두 자매 마리와 스티나, 그리고 이들에게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라그나르, 이 5인의 인물들이 각자의 삶에 대해 사건의 전말과 초래된 결과를 긴 독백과 대화체, 과거 회상 등으로 폭로하면서 ‘그 시기’ 이후 겪은 각자의 욕구불만, 고통, 정신적 외상을 표현하고 있다. 각 인물들에 대해 개개인의 감정을 면밀하게 연구하고 심리를 파헤치고 분석하는 과정을 통해 오사 게렌발은 한 가족 구성원들 사이의 의사소통 불능과 좀처럼 치유되지 않는 상처들을 날것 그대로 보여준다. 이 책은 이기주의, 두려움, 비겁함, 모순, 모두를 향한 책임감을 말해주고 있다.

오사 게렌발은 가족 구성원 모두에게 이미 깊이 뿌리박힌 소통의 불능을 더 잘 드러내기 위해 각자의 관점에서 개개인의 원한을 신랄한 독백으로 풀어낸다. 그것은 정밀하고도 섬세하고 놀랄 만한 초상으로 이어진다. 불안한 라그나르, 매사 비관적이고 냉소적인 마리와 낙관적인 스티나, 그리고 무관심한 라이프와 외면하는 건. 증인으로서 독자는 이 고통스러운 상황, 때로는 격렬한 감정에 치가 떨리기도 하다가 어느 부분 공감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에 쉽게 빠져들 것이다. 모든 도덕적 판단의 잣대를 작가는 전작 7층 에서 매우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글과 그림으로 드리운 바 있다. 가족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목적과 그 효과가 작가의 재담뿐 아니라 순수한 그림과 결합하여 또 한 편의 내면 고백 그래픽 노블을 만들어냈다.

‘우환 없는 집 없다’라고 하듯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게 가족이다. 그리고 내적으로든 외적으로든 가족이라는 틀은 언제나 든든한 백그라운드가 되어주어야 함이 마땅하다. 그렇지 못할 때 스스로 고립되는 문제에 봉착할 수 있다. 가족의 초상 은 한 가족의 구성원으로 서로간의 관계를 한 번쯤 짚어볼 기회를 마련해주는 책이다.